주머니만큼 여행하기

찬란한 청춘, 중년의 밑거름 본문

삐수니 일기2

찬란한 청춘, 중년의 밑거름

틈틈여행 2012. 5. 15. 01:04

주말, 2박 3일 여행을 했다.

이번 여행은 찬란했던 20대를 먼저 풀어놔야 이해가 쉬울것 같다.

 

동생이 여고에 입학하면서부터 우리 둘은 자취 모드로 들어갔다.

처음 자취방은 엄마가 나오셔서 구해주셨지만 그 방의 계약이 끝나면서부터 동생과

내가 직접 방을 구하러 다녀야했다.

세상에 많고많은 집 중에 방 하나 구하기가 왜그리 어렵던지...

우리가 지불할 수 있는 돈과 원하는 방의 차이가 서글픔과 비례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서글픔이란게 어찌어찌 방을 구하고 나면 씻은듯 사라지고 바로 싱싱해지는,

우리는 청춘이었다.

 

손바닥만한 우리 자취방을 중심으로 정말 많은 청춘들이 모여들었다.

내 친구들과 후배들, 동생 친구들과 선배들, 그 사이사이 그들의 친구들...

우린 백수당이란 이름을 붙이고 책을 읽고 여행을 하고 공연장으로 몰려다녔다.

그 뿐만 아니라 부모님들이 아시면 깜딱 놀라 머리카락을 다 잘라버리고 다리 몽뎅이를

분질러버릴  일들이 있었으니...혼숙이었다.

몰려다니며 놀다가 콧구멍만한 방에 모여 또다시 와글와글 떠들고 놀고 픽픽 쓰러져 자고

아침이면 학교로 직장으로 나가는 날들도 많았다.

 

우리는 텔레비젼이 없었고 일부러 전화없이 생활했다.

부모님께서 귀가시간을 체크하시는 날이면 우리의 청춘은 암흑이 될 것이 뻔한일이라..

지금 생각하면 참 신기하다.

어떻게 전화 없이도 그렇게 자주 많이 만나고 모일 수 있었지??

전화도 없고 부모님께서 자주 나와보시지 않아도 우리가 받아온 가정교육이 리모콘이

되어 원격조정되고 있었다.

무슨 일이고 옆에 부모님이 지켜보시는 듯, 한번 더 부모님 입장에서 생각했으니까.

특히 나는 동생을 책임지고 있는 언니라서 자유로운 가운데 책임감은 강한편이었다.

청소며 빨래, 연탄불 갈기들 웬만하면 내가 다 했었다.

 

어른들이 보시기엔, 아니면 우리의 자식들 일이라고 생각을 바꿔봐도 허락치 못할

소란스런 생활이었지만  함께 어울려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순수를 곁들인 순진함과

맑음이 있었다.

우리들의 부모님이 이해를 못하실 일이지 부모님들께 죄송한 일들은 아니었단 생각이다.

우리가 살았던 집주인 어른들은 워낙 우리가 뭉쳐다니는걸 보셔서 이해를 하게 되셨는지

아무리 밤늦도록 시끄럽게 웃고 떠들어도 한번도 싫은 내색없이 친절하신 편이었다.

우리가 싫으셨다면 늘 대문을 열어두시지도 않았을테고 몇 년 씩 살도록 내버려두시지도

않았을테니까..

다가구 주택의 옥탑방에 살 때는 우리가 사용할 초인종이 없어서 길게 돌을 묶어 내려놓고

잡아당겨 방문 표시를 하기도 했다.

옥상에서 삼겹살을 구워먹고 텐트를 치고 잠을 자고..옥탑방은 우리들만의 세계였다.

 

의정부에서 명동으로 출근을 하던 나는 박봉의 근로자였다.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먹성좋은 후배들을 위해 시장을 보고 음식을 만들었다.

가끔 우리집에서 가깝게 사는 애들은 먹거리를 싸들고 왔지만 대부분 누나이고 언니인

내 주머니에서 돈이 지불되었고 거의 모든 음식들이 내손에서 만들어졌다.

밥 외에 쫄면 떡볶이 라면 샌드위치등등..

그렇게 먹고 집에서 한참 떨어진 독일풍 카페로 걸어가 우리의 식재료값을 훨씬 웃도는

커피를 마시고 돌아왔다.

 

참으로 궁핍하던 시절이 분명한데  그때는 물론 중년이 된 지금 되돌려 생각해도 궁핍이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그 누구보다 풍요롭고 찬란한 20대를 보낸 덕분에 살아가는데 적잖은

힘이 되고 있다.

통장의 잔고를 늘리지 못했지만 독서량이 많았고 음반이 쌓였고 공연이며 영화 관람 티켓

모아둔게 무수했고 사진첩이 늘어났다.

자유롭고 풍요로운 영혼으로 살던 시절이었다.

몇 년 간 우리 자취방을 아지트로 몰려다니던 청춘들은 30여명에 가까웠다.

만나서 놀고먹던 백수당 청춘들이 어른이 되어 성공회 성직자 되고 공무원이 되고 약사가

되고 회사원이 되고 변호사가 되고 교사가 되고 사업가가 되고 가업을 물려받은 자영업자로

성공하고...

부부가 되어 세아들을 두기도 하고 두아들의 아빠가 되고 두딸의 엄마가 되고...

쉬흔이 되고 마흔 여덟, 마흔 일곱이 되고 마흔 다섯이 되었다.

 

 

**클릭하면 추억이 확대됩니당

'삐수니 일기2'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현주처제  (0) 2012.06.22
포상  (0) 2012.06.15
과거에서 온 엽서  (0) 2012.05.08
질부 보던 날  (0) 2012.04.14
입을래? 먹을래?  (0) 2012.02.23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