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 구름속의 산책
아..참으로 야박한 겨울날씨다.
1월에만 큰 산을 몇번째 가는데 이렇다 자랑질할만한 설경을 못만났으니..
설날 내내 기상청 홈페이지에 들락거리며 산악날씨를 살피다
태백산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더니 딱잘라 한마디.
"상고대 못 볼 겁니다"
그래도 2월 첫날 태백산을 향한다.
새벽 4시 울집 주차장에 경희샘과 재금 소현이 왔고
동서울 만남의 광장에서 동생 재형이 부부와 만났다.
명절주간이라 새벽임에도 차량이 아주 없지는 않다.
치악휴게소에서 여섯이 눈맞춰 인사하고 새해덕담을 나누며 도시락으로 아침밥을 먹었다.
따뜻한 밥과 풍성한 반찬들, 과일과 커피...내가 이래서 휴게소 음식을 못 사먹는다.
운전하기가 참으로 지루하다.
어쩜 상고대를 볼 수 없다는 말 한마디에 전의를 상실한 상태인데다
곧 봄이 올 것같은 버석한 산풍경 때문일게다.
정선의 끝자락에서야 멀리 산이 하얀 것에 그래도 눈은 있네하는 안도감과
푸근한 날씨, 비소식이 그대로 비로 내릴 것 같아 조마조마한 마음이 교차했다.
산행 들머리는 유일사매표소, 끈적끈적 수분 많은 눈이 달라붙는 산길을 걷기 시작한다.
모두들 포근한 날씨에 어깨 펴고 걸으며 상쾌하다, 좋다하니
설경이 아니어도 괜찮다 싶어 마음이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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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태백산이 처음이다. 눈꽃 축제하는 곳에는 설렁설렁 다녀와봤지만 ...
소현이가 체해서 컨디션 안좋아 민폐를 끼칠 것 같다해도,
재금이가 얼음에 미끄러져 넘어져 온몸이 아프다해도
저질체력의 완전 허당인 재형이 부부가 함께이니 염려말라 했는데
의외로 선전하는 부부.
허술한 괴나리 봇짐만큼의 산행허당들.
소현이는 잘걷지만 가파른 곳에 대한 공포심이 많고
재금이는 체력단련이 많이 필요하다.
언제 아팠냐 싶게 일단 나오니 잘 걷는다.
비가 오면 어쩌냐고 걱정,
물론 내가 걱정되서 얘들 것 까지 준비를 해왔지만 한 수 가르친다.
미리미리 산악날씨 살펴서 준비하는 습관 가지라고..
높이 올라갈수록 뽀얘지는 숲.
경희샘 너무 좋댄다. 요기다 비까지 와줘야 한다며..
정말 그럴래? 나도 안개 자욱한 날씨 너무 좋아한다규.
하지만 비는 아니잖아? 눈이어야 한다구 눈!!
남들 눈꽃 최고라고 사진 찍었을 장소에서 우린 정을 나눴다.
달달한 쵸코파이로..
산행 초짜들 넷에게 여기 이 나무들이 그리그리 모델이 되는 나무들이다..하면서.
눈 많이 내린 지난 주 아주 번잡했을 겨울숲이 고요하다.
우리가 안개라 하지만 저 산아래서 보면 구름걸쳐 있을 봉우리에 우리는 자리를 잡았다.
바람 많을 정상일거라 여겨지고 한갖지고 너른 뽀얀 숲이 좋아서였다.
비닐을 둘러치자 더 따뜻하고 아늑해져 청마해 첫 파티를 하기에 안성맞춤이 되었다.
와인잔에 덕담을 곁들여 마셨다.
안주는 까망베르 치즈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쏘세지 등등
우잉..이렇게 금방 정상이었어??!!
간식먹은 자리에서 몇걸음 떼지 않아 장군봉에 이르렀다.
아주 멋진 설경은 만나지 못했어도 기뻤다.
그냥 태백산에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이런 날씨를 좋아하니 좋았고, 사람이 너무 많지 않아 좋았고
모두 함께 잘 올라설 수 있어 좋았다.
새벽잠 깨어 운전하며 다시는 이런 산행 안하리다 먹었던 마음은 다 사라져버렸다.
관광객 코스라 꼬드기고
힘들면 되돌아 내려가라고 안심시켜 함께 온 이들이 뿌듯해하는 모습에
내 마음은 갑절 흔연하다.
사람 섞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이리저리 결 맞춰 어울리다 보면 증폭되는 감동에
모든 피로감들이 사라져 버리고 결심이 늘 무너지고 만다.
하산길은 가벼운 점프놀이로...
뛰고 또 뛰고..다리 힘 풀려 꼬일 때까지..
반재에서 한차례 간식상을 펼친다.
먼저 상을 펼친 사람들의 무개념에 툴툴거리며 테이블을 닦아냈다.
내가 먹은 쓰레기는 덜 더러운 법이다.
제발 머문자리 흔적없이 치우고 떠나갔으면 좋겠다.
달콤한 핫쵸코가 겨울산에서 제 맛을 낸다.
숲이 맑아졌다.
촉촉한 나무들이 곧 여린 싹을 틔울지 몰라 기다려야할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러다 다시 몇 번 추워야 봄일텐데 마음이 급하다.
돌아오는 고속도로는 염려보다 수월했다.
봄은 이리 수월하게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머릿속에 봄꽃에 맞춰 여행, 산행 계획이 이미 다 짜여졌지만
2월, 3월까지 제대로 된 눈 산행을 꼭 하고 싶다는 소망엔 변함이 없다.
한 달내내 거실에 준비되어있던 배낭이며 산행준비물을 오늘은 창고에 정리해뒀다.
지난주 만난 바다향기님은 내 블로그에 산행얘기만 있어서 들어오기 싫다 하셨다.
내가 미친듯이 산에 다니긴 했나보다.
경희샘도 곧 개학이라 바쁘대고 친구들이 함께 놀자고도 하니
당분간 쉬엄쉬엄 다니자 맘먹었으나 그 맘 그리 오래가지 않을테지만
헐렁하게 여백이 있는 거실과 뒹굴거리는 오늘도 나는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