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여행
좋은 풍경으로 아침을 열었다.
어디선가 몰려온 안개뭉치가 감탄할 풍경을 만들었다가 사라지자
리조트가 있는 동네는 다시 심심한 시골마을이 되었다.
온천에서 벅벅 때를 밀고 나와 먹는
하얀 햅쌀밥과 스팸넣어 잘 끓인 김치찌개는 달고 맛있었다.
선암사가 첫 여행지다.
어느해 초여름에 참 좋았던 선암사가
올 봄 홍매화 달큰한 향이 가득 할 때 또다른 매력으로 다가왔었다.
고즈넉한 삼나무 숲길로 돌아 들어가보는 늦가을의 선암사는
그 두 번의 행보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나목들 사이에 아직 곱게 물든채 눈길을 사로잡는 단풍나무
바삭하게 말랐으나 떨어지지 않은 이파라들이
대나무와 삼나무들과 어울려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산빛깔
앙상한 가지에 몇 개씩 달려있는 까치밥 주황색 감..
만추라는 계절에 더할 나위없이 잘 어울리는 풍경들이다.
꽃지고 열매지고 잎마저 다 떨군채 앙상해진 나무이름들을 알려주며
구석구석 아름다운 경내를 느릿하게 돌아보았다.
막 나오려던 참에 발견한 안내판 '식당 자율배식'
공양 할 수 있냐 얌전히 물어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콩나물 시금치 무우생채 갓김치 묵은지볶음과 된장국
달콤한 꿀떡까지..
마음에 점을 찍듯 먹는게 점심이라던가?
우리는 무지막지 커다란 점을 꽝 찍을 수 밖에 없었다.
절밥은 공으로 먹는게 아니란 것도 잊지않았다.
낙안읍성...마을 초입엔 번다하니 사람들이 많아 살짝 비켜가기로 하고
먼저 한가로운 성곽을 택해서 걸었다.
그림자 놀이던 점핑이던 유치한 제안도 서슴없이 받아주고
그것으로 함께 즐거워하는 이들이 내게는 최고의 여행동행이다.
오랫동안 함께 여행을 해오는 재형이네 가족과 함께
삐수니스타일 여행의 만족도를 가장 높일 수 있는 여행동반자들.
아주 고급하지는 않지만 적당한 체력과 빠릿빠릿 날렵하고 바지런한 몸짓.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좋은 식성과 넘치는 식욕
여행에 대해 활짝 열린 긍정적인 자세
때로 동행이 여럿이면 선뜻 승합차를 내놓는 품넓은 소현
고속도로 운전을 못하는 소현을 대신하는 재금과 나의 안전하고 빠르게 이동하는 기술
수박겉핥기식의 엉성한 여행정보를 말끔하게 포장해 내놓는 나.
그걸 품질좋은 정보라 믿고 따라주는 우직한 그녀들.
하지만 이번여행을 이별여행으로 삼자고 했었다.
물론 소현과 둘이 농담으로...
처음 들을 땐 웃어넘겼는데 자꾸 반복해 들으니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말.
나 때문에 재금이가 결혼 할 생각을 안하는거 아니냐니..나 원 참.
너무 재밌게 놀아주지 말래나 어쩌래나.
재금이 니 입으로 직접 이렇게 말하라규!!
"나, 여행이랑 결혼했어요~~"
"아냐. 내가 언니랑 놀아주는거야"
벌교에서 꼬막정식으로 점심을 먹자해놓고 선암사 점심공양을 했으니
40년만에 처음 와보는 동네들인데 그냥 가는게 서운하다며
육류보다는 꼬막이 더 좋다는 소현이.
저녁에 맘 편히 한우생고기를 먹기위해 벌교의 수복회관을 찾아갔다.
살짝 알맞게 데쳐진 짭쪼롬한 벌교꼬막..
맛있다.
극 친절한 사장님께서 인터넷에 꼭 올려달라셨다.
꼬막무침이 넘 달다했더니 막걸리 식초와 양파를 넣어서 그렇다셨다.
순천만..소현이 새들의 머리인줄 알았다는 줄지어선 사람들의 행렬.
갈대 반, 사람 반.
산보가 아니라 뒷사람의 진로를 방해하지 않도록 서둘러 걸어야지
사진이라도 한 컷 찍으려고 머뭇거리면 완전 민폐.
그래도 그 좁은 데크에 삼각대 세워두고 때를 기다리는 강심장들도 여럿있었다.
다리가 션찮아 빨리 걷지 못하는 재금을 꼬드겼다.
조금만 오르면 별천지를 보게될거야.
숨차게 올라선 용산전망대에는 예상대로
우리 몸 하나 끼워넣고 별천지를 바라보기도 어렵게 사람들로 빼곡하다.
전국민의 작가화, 전국민의 기자화.
삼각대에 대포만한 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를 세워놓고
꼼짝도 않고 원하는 장면을 기다리고 있으니..
세종대왕도 즐겨쓰시던 언사가 튀어나왔다.
우라질..저렇게 찍어서 모두들 어디에 쓰는건지..
전망대에 오를 때 전망좋다 싶은 위치에서 사진을 찍기위해
나무를 꺾어대는 사람들에게도 대왕의 언사를 흉내냈었다.
지랄..
사진찍기 좋은 곳에서는 얼른 인증샷 한컷 찍어주고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던 미풍양속이 싹 없어지고 말았다.
주먹만한 똑딱이 하나 들이밀고 사진찍을 자리도 안내어주는
그들의 취미생활이 아주 몹쓸 것으로 여겨진다고 투덜거렸다.
생계형인가? 어디다 파는거지?
딱 한사람이 살짝 자리를 비켜주더라며 달력그림으로 팔려 갈 것이라는 재금이 추측.
아...2013년 달력엔 온통 순천만 해질녘 사진뿐이겠네.
암튼 나의 순천만 사진은 그런 포토그래퍼들 틈새로 손을 내밀어
참으로 없어보이는 몸짓으로 겨우 건져낸 것이다.
옥과 IC에 근접한 한우촌에 갔다.
생고기를 먹고 싶었는데 주말이라 일찌감치 떨어졌단다. 큰실망..
게다가 서비스로 나오는 천엽도 떨어졌대고..
대신 나온 날 것으로 먹는 차돌박이는 처음입맛에도 고소해서 서운함을 달랠 수 있었다.
맑게 끓인 선지국이 어찌나 맛있던지 두 뚝배기나 먹는 바람에
정작 꽃등심은 셋이 3인분을 겨우 먹었다.
밤에 도착했는데도 동네와 집이 좋아보였다.
여기서 잠만 자고 서둘러 나가기엔 넘 아깝다.
화엄사 포기.
재금이 일이 있어 일찍 올라가기로 했으니 느긋하게 아침시간을 갖기로 했다.
곡성 심청 이야기마을, 8인용 한옥이 우리 숙소였다.
셋이 하루밤 간단히 잠만 자고가기에는 아깝고도 아까웠다.
수건도 하얗고 방이며 마루바닥, 그릇들도 하나하나 정성들여
관리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거기에 걸맞게 우리도 머문 티안나도록 깔끔하게 치우고 나왔다.
봄에 트레킹도 하고 레일바이크하면서 섬진강 상류를 즐겨보자고 마음 맞췄다.
반질반질 윤기나는 마룻바닥이 좋아서
차가워도 뒹굴뒹굴 굴러봤다.
따뜻한 계절엔 혹 비가와도 안심하고 바베큐 파티를 할 수 있도록
처마 아래 불판과 테이블이 준비되어있다.
밤새 지글지글 방을 따뜻하게 해놓고 푹 잤다.
아침산책으로 작은 마을의 구석구석을 돌아봤다.
'사진찍기 좋은 곳'
멀리보이는 멀고 가까운, 높고 낮은 산이 주는 색의 농담이 좋지만
특별히 사진 찍기 좋은 곳은 아니다 싶은데...
관리하시는 분이 오시더니 왕과 왕후의 옷을 입고 찍어보라며 옷방 문을 열어주셨다.
우리는 아주 신이 났다.
소현이 나더러 곤룡포를 입으란다.
키도 그렇고 대충 맞을거 같다고..아하!! 좋은 생각.
화엄사에 가볼 생각을 접었더니 이런 색다른 재미가 있다.
"아마 돈주고 체험하라면 안했을걸!!"
낄낄거리며 왕후복을 입혀주는데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려웠다.
가채가 두동강 나있길래 손대지 말고 보라는
마네킹모델의 가채를 슬쩍 벗겨서 씌워줬다.
앗! 재금이의 폴로셔츠와 나의 후드티는 어쩔 것이야.
재금이 왕후 되었다고 아주 좋댄다.
가채가 어찌나 무거운지 절로 자라목이 될 지경이란다.
이별여행을 와서 이렇게 혼례를 치른
왕과 왕후가 되어 부부의 연을 맺었다며 깔깔 허리를 꺾고 웃었다.
"재금..조심해. 그러다 가채 망가뜨린다"
이보시게 중전.
우리 영원히 사랑하기로 약조합시다.
여행말이오!!